"체포자 석방하라"…일본 경찰서장에 맞선 함홍기 열사

"체포자 석방하라"…일본 경찰서장에 맞선 함홍기 열사

  • 2019-02-22 20:25

[지역에서도 들끓은 만세운동①]강원도에서 가장 뜨거웠던 '양양'
경찰서 안에서 항의하다 두 팔 잃은 채 바로 숨져
함홍기 열사 죽음으로 불타오른 만세운동 '기폭제'

1919년 3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들끓은 기미 독립 만세운동이 100주년을 맞았다. 강원영동CBS는 지역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저평가되거나 조명받지 못한 이들의 활동을 재조명하고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연속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체포자 석방하라"…일본 경찰서장에 맞선 함홍기 열사
(계속)

함홍기와 권병연 열사 추모비. (사진=양양문화원 제공)

 

나라 잃은 설움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목소리를 내는 시도조차 가로막힌 현실 아니었을까. 강원 양양지역에서 활동한 함홍기 열사 이야기다.

지난 1919년 4월 4일. 양양문화원과 국가보훈처 등 자료에 따르면 장날인 이날부터 시작된 양양지역의 만세운동에는 장꾼을 가장한 4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들에 의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거리마다 뿌려지고 만세 소리는 온 장터에 '진동'했다. 동시에 이날 함홍기 열사 등 3명의 잇따른 죽음은 만세운동을 더욱 격렬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된다.

문제의 발단은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인 4월 3일. 일본 경찰은 만세운동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든 지도자 22명을 긴급 체포한다.

당시 군중을 모으고 각 마을에 소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한 함홍기 열사는 4일 관련 소식을 전해 듣고 경찰서로 달려간다. 함홍기 열사 옆에는 친구 권병연 열사, 그리고 뒤에는 1천여 명의 군중이 함께였다.

3·1운동 유적비. (사진=양양문화원 제공)

 

기록에 따르면 그는 사타쿠 경찰서장실로 들어가 항의하다 이내 옆에 있던 화로를 들고 뛰어들었다. 이때 옆에 있던 경찰 아끼야마와 오오이시는 곧장 칼(일본도)을 들어 함홍기 열사의 양팔을 내리치고 이어 배 부위를 찔렀다.

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이들을 구금했는지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함홍기 열사는 두 팔을 잃고 그 자리에서 끝내 숨졌다. 향년 24살.

이에 바로 옆에 있던 친구 권병연 열사가 격분해 뒤따라가 맞섰지만 목에 칼을 맞고 숨졌다.

들끓은 군중들이 "체포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강하게 항의하자 일본 경찰은 무차별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때 김학구 열사가 일본 경찰이 쏜 엽총에 의해 즉사했다.

3명이 연이어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양양 3·1 만세운동'은 전국 지방에서 가장 극렬하게 불타올랐고, 남녀노소 관계없이 모두 1만 5천여 명이 참가해 6일 동안 계속됐다.

함홍기 열사가 살던 집으로 현재 허물어졌다. (사진=함영덕씨 제공)

 

당시 가장 장렬하게 숨진 함홍기 열사는 양양 보통학교 출신으로 사망 당시 손양면 가평리 구장(현 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함홍기 열사는 직접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알리는데 적극 나섰다. 4월 9일 일어난 현북면 만세운동의 연결망에도 함홍기 열사가 있었다.

손자 함영덕(79)씨는 "할아버지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또 체격도 남달리 건장하셨다는 이야기를 할머니께서 해주신 기억이 난다"며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사망 당시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옷을 궤짝에 넣어두고, 종종 꺼내보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회상했다.

이어 "할머니는 영감님이 묻힌 집터를 벗어날 수가 없었던지 일본 경찰에 의해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단 한 번도 다른 지역으로 떠나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함홍기 열사의 손자 함영덕씨가 옛 집 사진을 보고 있다. (사진=유선희 기자)

 

기록과 함씨 증언에 따르면 함홍기 열사의 시신은 할머니가 눈물로 몇 날 며칠을 호소한 끝에 사망한 지 보름여 만에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일본 경찰은 그 조건으로 함홍기 열사를 아예 불태우거나 강물에 버릴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던 할머니는 그의 시신을 집 뒤편에 임시매장 했지만, 이내 발각된다. 그럼에도 끝끝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다시 집 앞에 묘를 만들었고, 다행히 현재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손자 함씨는 기억을 떠올리는 도중 종종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잔잔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아직도 일본말로 써야 했던 제 이름을 기억합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다 보니 자꾸 과거를 잊어버리게 되죠. 우리 젊은이들이 내 나라 언어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끝내 이루고 싶었던 것도 이것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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